May 1, 2002
내 앞에 놓인 예쁜 초록색 맥주명 6개...
담배를 2개피를 집어들었다, 하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는 나를 알고 내가 그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른아침 지친 몸으로 나가서 12시간 만에 돌아온 곳에는
깊은 허무와 불안감, 고통만이 남아있다.
숨쉬는것 조차도 괴로운 지금 난 누구에게 의지하려하는걸까?
그래, 차라리 나약한 내 자신을 위로 받고 싶은것일게다.
영어 몇마디, 토플 점수 몇점, 영화에대한 막연한 꿈...
이런것들을 위해 난 지금, 자아의 매춘을 하고있는건 아닐까?
하얀, 그리고 검은 사람들에게 그저 몇마디 던져보는 내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지...
사치일까? 헛된 감상일까...? 지금 이 순간도 난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
살아 숨쉬는것 조차 내게 너무나 커다란 고통인데...
아버지... 난 아버지란 존재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것 같다.
삶에 대한 집착일까...?
아니면 아직도 놓지못한 희망의 끈 일까?
아니, 아마도 아직은 내 삶을 소중히 여기는 내 맘이 아닐까...
뭐가 날 이렇게 묶어 놓고있는건지...
차라리 내 몸을 관통하는 붉은 맥을 끊어 자유롭고 싶다.
한마디 한마디 나를 깎아 내리면서도 난 위로 받고싶나보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보이지않아, 아무것도 할수없어
매마른 눈물은 내 속에서 나를 태운다.
1600불 짜리 인생이구나... 아마도 내 달쯤에는 1800불 짜리가 될게다...젠장...
맥주병 6개...
날 죽일듯이 몰아가는 아버지...
매일 12시간씩 계속되는 노가다판, 눈뜨면 몰려드는 막막함...
미련스럽게 계속되는 대한 아쉬움과 섭섭한 감정...
아직도 난 인간인가보다...
그리고 오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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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3번째 생일...
내 앞에 놓인 예쁜 초록색 맥주명 6개...
담배를 2개피를 집어들었다, 하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는 나를 알고 내가 그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른아침 지친 몸으로 나가서 12시간 만에 돌아온 곳에는
깊은 허무와 불안감, 고통만이 남아있다.
숨쉬는것 조차도 괴로운 지금 난 누구에게 의지하려하는걸까?
그래, 차라리 나약한 내 자신을 위로 받고 싶은것일게다.
영어 몇마디, 토플 점수 몇점, 영화에대한 막연한 꿈...
이런것들을 위해 난 지금, 자아의 매춘을 하고있는건 아닐까?
하얀, 그리고 검은 사람들에게 그저 몇마디 던져보는 내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지...
사치일까? 헛된 감상일까...? 지금 이 순간도 난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
살아 숨쉬는것 조차 내게 너무나 커다란 고통인데...
아버지... 난 아버지란 존재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것 같다.
삶에 대한 집착일까...?
아니면 아직도 놓지못한 희망의 끈 일까?
아니, 아마도 아직은 내 삶을 소중히 여기는 내 맘이 아닐까...
뭐가 날 이렇게 묶어 놓고있는건지...
차라리 내 몸을 관통하는 붉은 맥을 끊어 자유롭고 싶다.
한마디 한마디 나를 깎아 내리면서도 난 위로 받고싶나보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보이지않아, 아무것도 할수없어
매마른 눈물은 내 속에서 나를 태운다.
1600불 짜리 인생이구나... 아마도 내 달쯤에는 1800불 짜리가 될게다...젠장...
맥주병 6개...
날 죽일듯이 몰아가는 아버지...
매일 12시간씩 계속되는 노가다판, 눈뜨면 몰려드는 막막함...
미련스럽게 계속되는 대한 아쉬움과 섭섭한 감정...
아직도 난 인간인가보다...
그리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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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3번째 생일...
4년전...
미 조지아주 애틀란타 다운타운.
Five Point Station, 빈민, 거지, 창녀, 그리고 마약상들
잔뜩겁에 질린표정의 한국학생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버스에 오른다.
남부특유의 억양과 슬랭 그리고 욕설들 뉴포트와 팟 냄세가
진동하는 버스안에는 단 한명의 백인도 동양인도 없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버스기사와 승객들
블랙 커뮤니티 특유의 친근함을 과시하듯 승객들의 대화가 정겹다
갑자기 커다란 체구의 흑인친구 하나가 그 동양인에게 묻는다.
"gonna get ei pot? uh?'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가 없다...
Pryor RD, Atlanta
조지아주에서 두번째로 가난한 동네
100% 흑인 빈곤층 커뮤니티의 전형이자 총기사고 다발지역
"너 일할 수 있겠냐? 작년에도 눈에 구멍나서 하나 죽어나갔어"
"예, 그런데 페이가..."
매일밤 들려오는 총성과 싸이렌소리
사방이 철창과 방탄유리로 둘러쌓인 한평남직한 부스안
그곳이 한 막의 시작이였다.
------------------------------------------------------------
Two Jobs.
18 hours work everyday without off
좋은차에 명품옷 그리고 능숙한 영어실력
환한 미소와 함께 언더그라운드를 활보하는 유학생과 2세들
산같이 쌓인 맥주 상자더미
비상버튼, 권총3개, 그리고 납으로된 총알들
작은부스안의 내 삶은 그들의 삶과 너무도 달랐다
난
Five Point 에서 유일하게 MARTA BUS 를 타는 동양인이 되었다.
일을 마치면 지하철 한구석에서 홈리스들과 웅크려 잠들어야했다.
하루 18시간의 노동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행복했다.
나에겐 꿈이 있었고 그 꿈에 하루하루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에
왜 나라고 또래 친구들처럼 살고 싶지않았겠는가?
좋은차에 좋은집 좋은학교 예쁜여자친구 그리고 삶의 여유까지...
솔직히 부러웠다, 내 젊음이 이렇게 소진된다는게 싫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젊음을 다 바쳐 이루고 싶은 꿈과
언제나 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있었다.
영화 'Pursuit of Happiness' 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속 크리스(윌스미스분)는 우리에게 포기하지 않는삶을 말한다.
월스트릿의 신화로 불리는 크리스가드너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자살이란 단어가 익숙한 요즈음 한번쯤 볼만한 작품인듯싶다.
극중 윌스미스가 아들을 안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잠들때
자꾸 옛날생각 나더라, 자꾸 나태해지는 요즈음 다시한번
내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준 정말 고마운 영화다.
미 조지아주 애틀란타 다운타운.
Five Point Station, 빈민, 거지, 창녀, 그리고 마약상들
잔뜩겁에 질린표정의 한국학생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버스에 오른다.
남부특유의 억양과 슬랭 그리고 욕설들 뉴포트와 팟 냄세가
진동하는 버스안에는 단 한명의 백인도 동양인도 없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버스기사와 승객들
블랙 커뮤니티 특유의 친근함을 과시하듯 승객들의 대화가 정겹다
갑자기 커다란 체구의 흑인친구 하나가 그 동양인에게 묻는다.
"gonna get ei pot? uh?'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가 없다...
Pryor RD, Atlanta
조지아주에서 두번째로 가난한 동네
100% 흑인 빈곤층 커뮤니티의 전형이자 총기사고 다발지역
"너 일할 수 있겠냐? 작년에도 눈에 구멍나서 하나 죽어나갔어"
"예, 그런데 페이가..."
매일밤 들려오는 총성과 싸이렌소리
사방이 철창과 방탄유리로 둘러쌓인 한평남직한 부스안
그곳이 한 막의 시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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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Jobs.
18 hours work everyday without off
좋은차에 명품옷 그리고 능숙한 영어실력
환한 미소와 함께 언더그라운드를 활보하는 유학생과 2세들
산같이 쌓인 맥주 상자더미
비상버튼, 권총3개, 그리고 납으로된 총알들
작은부스안의 내 삶은 그들의 삶과 너무도 달랐다
난
Five Point 에서 유일하게 MARTA BUS 를 타는 동양인이 되었다.
일을 마치면 지하철 한구석에서 홈리스들과 웅크려 잠들어야했다.
하루 18시간의 노동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행복했다.
나에겐 꿈이 있었고 그 꿈에 하루하루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에
왜 나라고 또래 친구들처럼 살고 싶지않았겠는가?
좋은차에 좋은집 좋은학교 예쁜여자친구 그리고 삶의 여유까지...
솔직히 부러웠다, 내 젊음이 이렇게 소진된다는게 싫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 젊음을 다 바쳐 이루고 싶은 꿈과
언제나 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있었다.
영화 'Pursuit of Happiness' 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속 크리스(윌스미스분)는 우리에게 포기하지 않는삶을 말한다.
월스트릿의 신화로 불리는 크리스가드너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자살이란 단어가 익숙한 요즈음 한번쯤 볼만한 작품인듯싶다.
극중 윌스미스가 아들을 안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잠들때
자꾸 옛날생각 나더라, 자꾸 나태해지는 요즈음 다시한번
내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준 정말 고마운 영화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우리에겐 병이 됐네...
아무 힘도 없는 내 사랑이 가엾다...
아무 힘도 없는 내 사랑이 가엾다...
the U.S.
nation of immigrants...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nation of immigrants...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광화문거리 픽스샷 한참동안 인트로 치다가 자전거탄 사람이 우측에서 프레임안으로 들어오면서 멍하니 반대쪽을 응시한다 "월컴 홈" 시작.
“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
있는 것은 오직 한순간 한자리에만 있다는 걸 알게 되리니“
T.S. 엘리엇 - 재의 수요일
이 영화는 일단은 ‘여행기’ 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영화는 크리스라는 친구가 일본과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보내온 편지와 영상들을 나레이션을 통해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여행기’ 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면 아마 당황하고 말 것이다. 영화는 ‘여행기’뿐 아니라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들을 쌓아올리는’ 형식의 진행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크리스가 여행을 통해 받은 인상들을 ‘나열’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나열’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 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딱히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열’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오히려 영화는 의도적으로 통합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 그것은 크리스가 마치 하나의 인상으로부터 다른 인상으로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연상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화면을 의도적으로 정지하거나 한 장면에서 영상과 맞지 않는 나레이션을 배치하는 등 일종의 ‘파편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보통 흩어진 것, 즉 파편화된 것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말했다. “난 평생 기억의 작용을 연구하며 살게 될 거야.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거야. 우리는 기억하는게 아니라 기억을 다시 쓰는 거야. 역사가 계속 다시 쓰이는 것처럼 말이야. 갈증을 기억해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3년전인 2006년 겨울, 친구들과 함께 인도로 한달간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추위에 덜덜 거리던 순간이나 그 지긋지긋하던 카레의 맛과 향등 몇몇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나의 여행 루트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마 어딘가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고, 그 기록을 보면 마치 생각났다는 듯 “그랬었지”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기록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기억은 과거의 ‘진실’된 모습과는 다르다. 오직 하나, 그 과거로부터 남겨진 진실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의 인상이며, 이는 곧 ‘기억의 파편’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 파편들을 임의의 순서로 이어붙이며 하나의 기억을 완성한다. 마치 영화를 만들 듯이 말이다. 이렇듯 쉽게 과거는 지금, 현재로부터 재생산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가 내게 말해준 첫 장면은 1965년 아이슬란드의 어느 길에서 보았다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크리스에게 그 장면은 절대로 다른 장면의 앞뒤에 이어 붙일 수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언젠가 이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할거야. 영화의 앞머리에 검은 화면을 아주 길게 해서 말이지. 관객들이 만약 행복을 볼 수 없다면 검은색이라도 보겠지.”
보통 영화를 찍을 때 그 줄거리의 순서대로 찍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배경이나 날씨 혹은 시간 등 여건에 맞게 여러 장면을 몰아서 찍는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같이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만들어진 여러 장면들이 하나의 영화로 완성되는 곳은 촬영이 끝난 후 편집실에서 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각각의 장면들은 임의의 순서로 이어붙여져 하나의 영화로 완성된다.(과거의 탄생과 비교해보라)
여기서 한가지, 그 각각의 장면이라는 조각들은 어떤 큰 그림의 파편(직소퍼즐처럼)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나의 레고 조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각들을 어떻게 이어붙이고 맞춰나가느냐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축조도 가능하다. 이는 재생산된 과거의 기억이 실재 과거의 진실과는 다르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하나의 장면은 다른 하나의 장면과의 관계속에서 그 의미가 탄생한다. 혹은 의미가 어떤 하나의 장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들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 이것이 몽타주 이론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의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각각의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이어붙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탄생과정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이제는 그 각각의 파편들로 되돌아가 보자. 여기 그 자체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파편이 있다. 당신은 이 파편을 가지고 영화를 찍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장면과 이어붙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장면과 이어붙이든 간에 그로인해 파편의 의미가 정해진다는 몽타주 이론에 따르면, 그 파편 고유의 행복이라는 의미는 변형, 왜곡될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아무것과도 연결하지 않는 것이다. 즉, 검은 화면(무)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19번이나 본 한 영화(Vertigo)를 따라 순례했어.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가상 영화를 만들었어. 그 해 여름에 길에서 3명의 아이들과 만났고 바다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을 보았어. 미국 우주 비행사들은 달나라로 가기 전에 달과 흡사한 이 지역으로 적응 훈련을 왔어. 곧 나는 그곳이 공상과학 소설의 배경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다른 별의 풍경. 아니, 먼 외계에서 온 사람이 보는 지구의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 외계인이 아주 천천히 무겁게 발걸음을 떼며 발바닥에 자꾸만 달라붙은 화산 근처의 흙을 밟는 모습을 상상해. 그러다 갑자기 그가 넘어지는 거야. 일어나면 일년이 지나있어. 그리고 그는 바닷새 보호구역을 따라 난 작은 길을 걷는 거야. 그것이 시작이야. 왜 시간이 이렇게 잘려나가고, 기억들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것이냐고? 그는 이해하지 못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4001년 우리의 미래에서 왔어. 인간의 뇌가 가장 발달되어 있을 시기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완전한 기억 능력은 마취된 기억이야.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할거야.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교만해지거나 과거의 인류와 그 그림자를 조롱하지 않아. 오히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나중에는 연민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그가 온 세상에서는 초상화를 보고 감동하고 음악 소리에 전율하는 것이 길고 고통스런 선사시대의 표시일 뿐이야. 그는 이해하고 싶어해. 그는 시간의 약점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부조리에 60년대 청년들이나 체 게바라처럼 분노해. 그는 시간의 제3세계인이야. 그에게는 과거 그의 별에 불행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현재 가난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참기 어려워. 결국 그는 실패할거야.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빈곤을 부유한 나라 아이들이 상상하지 못하듯이 그 역시 불행을 절대 알 수 없어. 그가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은 그를 이런 탐구의 길로 이끈 무소르그스키의 연작 가곡이야. 그 음악은 40세기에도 여전히 들려지고 있어. 그 의미는 잊혀진지 오래지만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느껴. 그것은 불행이나 기억과 관련된 것이야. 그는 그것들을 향해 천천히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지. 물론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 영화의 세트를 수집하고 반전을 상상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보곤 했어. 이미 제목도 생각해놨어. 무소르그스키 음악의 제목과 같아.”
“태양없이.”
파편. 왜 파편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파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의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 파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가 변형, 왜곡되는 과정이 (조금 오바하자면)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통합의 한가운데에서 해체를 꿈꾼다.
파편. 잊혀진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순간의 영원성. 시간이 쌓아올린 잔인한 상처. 소외된 이들.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 기시감. 투쟁. 그리고 현기증.
파편. 이 영화는 파편의 영화다. ‘태양 없이’도 아름답게 빛나는 파편들의 영화다.
있는 것은 오직 한순간 한자리에만 있다는 걸 알게 되리니“
T.S. 엘리엇 - 재의 수요일
이 영화는 일단은 ‘여행기’ 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영화는 크리스라는 친구가 일본과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보내온 편지와 영상들을 나레이션을 통해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여행기’ 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면 아마 당황하고 말 것이다. 영화는 ‘여행기’뿐 아니라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들을 쌓아올리는’ 형식의 진행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크리스가 여행을 통해 받은 인상들을 ‘나열’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나열’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 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딱히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열’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오히려 영화는 의도적으로 통합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 그것은 크리스가 마치 하나의 인상으로부터 다른 인상으로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연상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화면을 의도적으로 정지하거나 한 장면에서 영상과 맞지 않는 나레이션을 배치하는 등 일종의 ‘파편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보통 흩어진 것, 즉 파편화된 것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말했다. “난 평생 기억의 작용을 연구하며 살게 될 거야.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거야. 우리는 기억하는게 아니라 기억을 다시 쓰는 거야. 역사가 계속 다시 쓰이는 것처럼 말이야. 갈증을 기억해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3년전인 2006년 겨울, 친구들과 함께 인도로 한달간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추위에 덜덜 거리던 순간이나 그 지긋지긋하던 카레의 맛과 향등 몇몇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나의 여행 루트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마 어딘가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고, 그 기록을 보면 마치 생각났다는 듯 “그랬었지”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기록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기억은 과거의 ‘진실’된 모습과는 다르다. 오직 하나, 그 과거로부터 남겨진 진실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의 인상이며, 이는 곧 ‘기억의 파편’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 파편들을 임의의 순서로 이어붙이며 하나의 기억을 완성한다. 마치 영화를 만들 듯이 말이다. 이렇듯 쉽게 과거는 지금, 현재로부터 재생산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가 내게 말해준 첫 장면은 1965년 아이슬란드의 어느 길에서 보았다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크리스에게 그 장면은 절대로 다른 장면의 앞뒤에 이어 붙일 수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언젠가 이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할거야. 영화의 앞머리에 검은 화면을 아주 길게 해서 말이지. 관객들이 만약 행복을 볼 수 없다면 검은색이라도 보겠지.”
보통 영화를 찍을 때 그 줄거리의 순서대로 찍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배경이나 날씨 혹은 시간 등 여건에 맞게 여러 장면을 몰아서 찍는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같이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만들어진 여러 장면들이 하나의 영화로 완성되는 곳은 촬영이 끝난 후 편집실에서 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각각의 장면들은 임의의 순서로 이어붙여져 하나의 영화로 완성된다.(과거의 탄생과 비교해보라)
여기서 한가지, 그 각각의 장면이라는 조각들은 어떤 큰 그림의 파편(직소퍼즐처럼)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나의 레고 조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각들을 어떻게 이어붙이고 맞춰나가느냐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축조도 가능하다. 이는 재생산된 과거의 기억이 실재 과거의 진실과는 다르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하나의 장면은 다른 하나의 장면과의 관계속에서 그 의미가 탄생한다. 혹은 의미가 어떤 하나의 장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들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 이것이 몽타주 이론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의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각각의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이어붙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탄생과정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이제는 그 각각의 파편들로 되돌아가 보자. 여기 그 자체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파편이 있다. 당신은 이 파편을 가지고 영화를 찍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장면과 이어붙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장면과 이어붙이든 간에 그로인해 파편의 의미가 정해진다는 몽타주 이론에 따르면, 그 파편 고유의 행복이라는 의미는 변형, 왜곡될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존하기를 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아무것과도 연결하지 않는 것이다. 즉, 검은 화면(무)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19번이나 본 한 영화(Vertigo)를 따라 순례했어.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가상 영화를 만들었어. 그 해 여름에 길에서 3명의 아이들과 만났고 바다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을 보았어. 미국 우주 비행사들은 달나라로 가기 전에 달과 흡사한 이 지역으로 적응 훈련을 왔어. 곧 나는 그곳이 공상과학 소설의 배경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다른 별의 풍경. 아니, 먼 외계에서 온 사람이 보는 지구의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 외계인이 아주 천천히 무겁게 발걸음을 떼며 발바닥에 자꾸만 달라붙은 화산 근처의 흙을 밟는 모습을 상상해. 그러다 갑자기 그가 넘어지는 거야. 일어나면 일년이 지나있어. 그리고 그는 바닷새 보호구역을 따라 난 작은 길을 걷는 거야. 그것이 시작이야. 왜 시간이 이렇게 잘려나가고, 기억들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것이냐고? 그는 이해하지 못해. 그는 다른 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4001년 우리의 미래에서 왔어. 인간의 뇌가 가장 발달되어 있을 시기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완전한 기억 능력은 마취된 기억이야.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할거야.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교만해지거나 과거의 인류와 그 그림자를 조롱하지 않아. 오히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나중에는 연민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그가 온 세상에서는 초상화를 보고 감동하고 음악 소리에 전율하는 것이 길고 고통스런 선사시대의 표시일 뿐이야. 그는 이해하고 싶어해. 그는 시간의 약점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부조리에 60년대 청년들이나 체 게바라처럼 분노해. 그는 시간의 제3세계인이야. 그에게는 과거 그의 별에 불행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현재 가난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참기 어려워. 결국 그는 실패할거야.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빈곤을 부유한 나라 아이들이 상상하지 못하듯이 그 역시 불행을 절대 알 수 없어. 그가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은 그를 이런 탐구의 길로 이끈 무소르그스키의 연작 가곡이야. 그 음악은 40세기에도 여전히 들려지고 있어. 그 의미는 잊혀진지 오래지만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느껴. 그것은 불행이나 기억과 관련된 것이야. 그는 그것들을 향해 천천히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지. 물론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 영화의 세트를 수집하고 반전을 상상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보곤 했어. 이미 제목도 생각해놨어. 무소르그스키 음악의 제목과 같아.”
“태양없이.”
파편. 왜 파편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파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의도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 파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가 변형, 왜곡되는 과정이 (조금 오바하자면)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통합의 한가운데에서 해체를 꿈꾼다.
파편. 잊혀진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순간의 영원성. 시간이 쌓아올린 잔인한 상처. 소외된 이들.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 기시감. 투쟁. 그리고 현기증.
파편. 이 영화는 파편의 영화다. ‘태양 없이’도 아름답게 빛나는 파편들의 영화다.